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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장 성도

 1. 성도의 전야

 <본생담> 불전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태자는 핍발라 또는 아삿타라라는 이름의 나무밑에서 성도하였다. 성도, 즉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은 인도말로 ‘보리를 얻었다는 것이므로 이 나무를 보리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수행자가 나무 밑에 앉아서 수행한다는 것은 인도에서 옛날부터 행해진 습관이다. 특히 아삿타 나무는 예부터 존경되어 온 나무로서 그 그늘 밑은 <아타르바베다>의 고가 속에서도 ‘불사’를 명상하는 장소라고 되어 있다. ‘불사(不死)’란 정신적인 궁극의 경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와 같은 견해는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기타>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태자는 강에서 목욕하고 ‘수쟈아타’란 소녀가 드리는 음식을 먹고, 강가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사라수 숲속에서 한낮의 휴식을 취하고 저녁에 꽃잎이 떨어질 무렵 천인들이 여러 가지 장식을 갖다 붙인 여덟 마리의 황소가 늘어선 것 같이 넓은 길을 마치 사자가 몸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하여 보리수를 향해 걸어갔다. 용, 야차, 금시조 등이 천상계의 향기로운 꽃으로 공양하고 천상의 음악이 시작되고 무수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모두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그때 길상이란 풀 베는 사람이 풀을 쥐고 그 길에 있다가 태자의 모습을 보고 여덟 줌의 풀단을 바치자, 태자는 그 풀을 가지고 보리수 밑의 자리에 올라 남쪽에서 북방을 향하여 섰다. 그러자 남쪽이 가라앉고 무간지옥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는 반면, 북쪽은 솟아올라 유정천에 달한 것같이 보였으므로 이것은 성도의 자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오른편으로 돌아 서쪽으로 가 동방을 향하고 섰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서쪽이 가라앉고 동쪽이 솟아올랐다. 북쪽으로 가 남방을 향하니까 역시 북쪽이 가라앉고 남쪽이 솟아올랐다. 태자는 이것도 보리를 얻기 위한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른편으로 돌아 동쪽에 가 서방을 향해 섰다. 그때 그 자리는 동요함이 없었다. 태자는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자리며 번뇌의 기틀을 분쇄할 수 있는 자리인 것을 알고, 가지고 온 풀 끝을 쥐고 흔들자 곧 열네 손[手] 폭 만한 넓이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태자는 보리수나무를 등지고 동면하여 굳센 마음으로 “가죽도 근육도 뼈도 마를 테면 마르라. 체내의 살도 피도 마르라. 정각에 도달하지 않고는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확고 부동한 가부좌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것을 안 마왕은 “싯다르타 태자는 내 지배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벗어나게 내버려 두어서 될 것인가?”하고 마군에 접근하여 이와 같이 말하고 요란스런 소리를 일으켜 마군을 인솔하고 나왔다. 마군의 행렬과 호위하는 소리는 어마어마하게 길고 어마어마하게 컸다. 마왕은 ‘기리메에카라’라는 큰 코끼리를 타고 수천의 화신을 만들어 갖가지 무기를 갖게 했는데 하나도 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태자에게 살도해 왔다. 
 그때 삼천세계의 천인들은 모두 옆에 서서 태자를 찬탄하고 천인들 중의 하나인 제석천은 ‘대승리’란 이름의 나패를 불며 서 있었다. 이 나패는 백 20손 길이나 되는 큰 것으로 한번 불어넣으면 넉 달 동안이나 그냥 계속해서 울린다는 것이다. 마하아카아라 용왕은 백구도 넘는 게송으로 찬탄을 하며 서 있었고, 대범천은 흰 일산을 받들고 서 있었다. 마군은 태자가 앉은 금강처럼 튼튼한 보좌 가까이까지 오기는 왔으나 아무도 더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태자를 향했다가는 또 도망치고 그러기를 계속하였다. 마군이 내습하자 마하아카아라 용왕은 땅 속 깊숙이 있는 만제리카 용궁으로 도망해 들어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누웠다. 제석천은 나패를 메고 세계의 끝까지 달아나고, 대범천은 흰 일산을 세계의 끝에 세워놓고 자기 세계로 도망쳐 버렸다. 한 사람의 천인도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 달아나고 태자 홀로 그대로 않아 있었다. 마왕은 그 군세를 향해 말하기를 “이 정반왕의 태자, 싯다르타에 비할 만한 사람은 없다. 우리도 정면에서 싸울 수는 없다. 뒤로부터 달려들자”라고 하였다. 태자는 삼방을 보고 모든 천인들이 달아난 것을 알고, 또 북쪽으로부터 살도하는 마의 대군을 보았다. ‘이렇게 많은 군세가 나 혼자에게 닥쳐온다. 여기에는 내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이 십바라밀만이 오랫동안 내가 기른 군세와 같을 뿐이구나. 그러니 이 바라밀을 방패로 해서 그 칼로써 침공해 오는 마군을 분쇄하고 말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십바라밀을 염하면서 앉아 있었다. 
 마왕은 먼저 태자를 놀라게 하여 그곳에서 물러나도록 하려고 바람을 일으키는 수레인 풍륜을 던졌다. 곧 사방으로부터 큰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바람은 높고 산들은 무너뜨리고 숲과 나무들을 뿌리째 빼버리고, 마음이나 성읍을 분쇄할만한 위력이 있는 것이나, 태자의 덕의 힘으로 그 위력이 죽어 태자 가까이에서는 그 옷자락을 흔들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마왕은 물로써 공격하여 죽이려고 큰비를 내리도록 하였다. 그 때문에 겹겹이 쌓인 뭉게구름이 비를 억수로 쏟아 땅에 구멍을 뚫고 숲의 나무가 전부 물에 잠길 정도로 많이 쏟아졌다. 그래도 태자의 옷은 이슬방울 정도의 빗방울도 맞지를 않았다. 마왕이 돌을 빗발치듯 날려보냈다. 큰산이 하늘에서 무너져 굴러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그 돌들은 태자 옆에 오자 천상의 꽃으로 바뀌었다. 마왕은 또 칼날을 빗발치듯 날려보냈다. 칼이나 창이나 화살의 예리한 날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으나 그것 역시 태자 옆에서 천상의 아름다운 꽃이 되고 말았다. 불덩이를 빗발치듯 하늘에서 내려 떨어지게 하면 그것도 역시 태자 곁에서는 천상의 꽃이 되었다. 뜨거운 재를 비 오듯 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향 가루가 되었고 토사를 뿌리면 그것이 또 천상의 꽃이 되었다. 진흙은 도향(塗香, 바르는 향)이 되었다. 마왕이 ‘이것으로 놀라게 해 내쫓으리라’하고 캄캄한 암흑을 일으키면, 사방이 캄캄하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지만 태자의 옆에서는 햇빛을 만난 것처럼 어둠이 사라졌다. 마왕은 이렇게 아홉 가지의 공습을 해 보았으나 효력이 없는 것을 보자 옆에 있는 부하들에게 질책하며 ‘잡아 때려서 달아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그 기리메에카라 코끼리 위에 올라타고 챠크라라는 무기를 들고 태자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는 ‘싯다르타야,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 네게 적당한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는 내 것이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태자는 그 말을 듣고 ‘너는 십바라밀을 닦은 일이 없다. 하물며 그 위의 바라밀 그 위의 최상의 바라밀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다섯 가지 대사시(大捨施, 큰 희생)도 혜행(慧行, 지혜의 실현)도 세간행(世間行, 현실참여)도 각행(覺行)도 모두 닦지 않고 있다. 이 자리는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하고 말하였다. 
 마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챠크라를 태자에게로 향해 던졌다. 그러나 십바라밀을 염하고 있던 태자 머리 위에서 그것은 꽃으로 만든 일산이 되고 말았다. 챠크라란 무기는 면도칼날처럼 예리한 것으로 아무리 굳은 바위라도 마치 대를 자르듯 잘라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일산이 되고 만 것이다. 나머지 군세는 이번에는 하고 큰 암산을 헐어 태자에게 던졌으나 그것도 또 아름다운 꽃이 되었다. 천인들은 세계의 말단에 서서 머리를 길게 빼고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태자의 몸이 산산이 흩어져 미진이 되었으리라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태자는 ‘바라밀을 원만히 성취한 구도자가 정각을 이루는 날 쓰여질 이 자리는 나의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왕아, 네가 보시를 행했다는 데 대한 증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마왕은 ‘이것들이 다 내 증인이다’하고 그 군대를 가리켰다. 마왕의 군대는 제각기 “내가 증인이요, 내가 증인이요”하고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대지를 흔들어댔다. 그 뒤 마왕은 태자에게 태자의 증인은 누구냐고 물었다. 태자는 “네가 보시한 데 대해서는 유심의 증인이 있지만 내가 한 보시에 대해서는 유심의 증인은 없다. 내가 타생에 있어서 행한 보시는 잠시 말하지 않는다 치고 벳산타라 태자였을 때 행한 칠백의 대시에 대해서는 유심이 아니고 무정한 자라고는 하겠지만 이 중후한 대지가 증인이다.” 이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가지고 대지를 짚었다. 대지는 “내가 그때의 증인이다”하고 백천만의 규환을 일으켜 마군을 제압하고 말았다. 또 마왕이 타고 있던 기리메에카라 코끼리도 그 태자의 대시를 생각하면서 큰 몸집을 땅에 던져 무릎을 끊었다. 마군은 그 목걸이며 속옷들까지도 남긴채 뿔뿔이 팔방으로 달아나 버렸다. 천인들은 이 마군의 대패배를 보고 “마군은 졌다. 싯다르타는 이기셨다. 승리의 공양을 드리자”하면서 향기로운 꽃을 손에 들고 태자에게로 나아가 그 승리를 찬미하였다. 황금의 날개를 가진 새들도 용도 그 밖의 모든 천인들이 다 그 뒤를 따라 태자를 찬미했다. 
 태자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의 통일적인 정형을 찾을 수가 없으나 여러 경전이 열거하는 것을 보면 그 중에는 우선 4선이 들어 있다. 4선을 얻은 사실을 말하는 석가 자신의 말씀을 경전에 의하여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참으로 애써 확고한 노력정진을 했다. 염하는 바가 확립되어 있어 누실이 없고, 육신은 가볍고 흥분함이 없었으며, 마음이 통일되어 있었다. 나는 욕망을 떠나있었고, 불선한 일들에서 떠나있었고, 사려의 거침 사려의 미세함은 있었으나, 원리로부터 생긴 기쁨과 즐거움인 초선을 성취해 가지고 있었다.
  사려의 거칠음과 사려의 미세함이 지멸된 까닭에 내심은 고요하고 평안해지고, 마음이 통일되어 사려의 거칠음도 미세함도 없는 정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인 제2선을 성취해 가지고 있었다. 기쁨에 물들지 않은 까닭에 평정하고 염하는 바가 바르고, 육신에 안락을 느끼고 있었다. 즉 성자가 ‘평정하고 염이 바르고, 안락에 머물러 있다’고 말씀하신 바 제3선을 성취해 가지고 있었다. 낙도 고도 아닌 평정하고 염하는 바가 바른 그리하여 청정한 제4선을 성취해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태자의 마음은 고요하고, 맑고, 더러움 없고, 부드럽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그 마음으로 태자는 과거를 상기하고 먼 몇 세대 이전의 일들을 상기하였다고 한다. 같은 경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 하나하나의 상 및 상세한 상황과 더불어 허다한 과거의 생애를 상기하였다. 이것이 초경에 접어든 밤에 도달된 제일의 명지다. 여기에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가 생긴 것이다. 암흑은 소멸하고 광명이 생겼다.
 그리하여 마음이 통일되고, 청정하고, 맑고, 더러움 없고, 부드럽고, 슬기로우며, 굳건하여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 모든 사람의 사생을 아는 데로 내 마음을 돌렸다. 즉 나는 청정하고 초인적인 천안을 가지고 모든 중생이 죽고 또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즉 비천한 자와 고귀한 자, 아름다운 자와 추한 자,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로서 모든 중생이 각자의 업에 따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 이것이 내가 중경에 들어선 밤에 도달한 제일의 명지다. 
 태자는 제3경에 이른 밤중에 제3의 명지를 얻었다. 그 제3의 명지란 모든 더러움을 멸하는 지혜에 통함을 말한 것이다. 그 지혜의 모습을 경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일체는 고통이라고 여실히 알았다. 내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보았을 때, 다음은 더러움에서 해탈되고, 마음은 생존의 더러움에서 해탈되고, 마음은 무명의 더러움에서 해탈되었다. 해탈되어 버렸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겼다. ‘생은 다 되었다. 청정행이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이 이미 다 되었다. 이제는 그러한 생존의 상태에 달하는 일이 없다’고 알게 되었다. 아, 이것이 제3경에 다다른 밤중에 도달된 제3의 명지다. 여기에 무명은 사라지고, 명지가 생긴 것이다. 암흑은 소멸하고 광명이 생긴 것이다.
 이 세 가지 명지를 한역경전에서는 ①숙명통 ②천안통 ③누진통이라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제3의 명지 즉 누진통은 곧 네 가지 온전한 지혜(智慧, 사성제를 알고, 속세의 허망함이 연기의 탓임을 아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지막 지혜가 생긴 것은 밤이 가고 새벽이 동틀 무렵이었던 것이다.
 대지는 기쁨에 뒤흔들리고, 세계는 휘황하게 밝고, 천인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어 천상의 꽃을 뿌리고,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고, 여기에 새로운 부처님의 탄생을 찬양해 마지않았다. 기쁨의 노래가 태자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나고 죽는 일이 헤아릴 수 없는 바요 
 가고 옴이 또한 실마리가 없는 일이로다. 
 집에 머물러 구하는 자는 
 수많은 아이를 얻을 뿐이니 
 이를 보고서야 
 다시는 집을 짓지 않을 것이요 
 있는 들보와 서까래도 허무를 일이로다. 
 축대마저 무너뜨리고 나면 
 마음은 자유로이 떠다니고 
 그 가운데 적멸하는도다.  
<法句經>

 그리하여 태자는 그가 구하고 또 구해 온 ‘선’을 완전히 얻어, 지금이야말로 세상의 어떠한 공양도 받아 마땅한 옳게 깨달은 분 불타가 된 것이다. 그때의 나이는 35세, 인도의 달력으로는 제2 비샤아카의 달 대보름날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 날자는 남방불교 소전의 것이다. 이것은 태양력으로 고치면 오월의 만월날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역불전에서는 2월 8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곳이 많다. 그 까닭은 비샤아카 달이 인도력의 둘째 달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법은 자주 바뀌었으나 주의 역법에 의하면 음력의 11월을 첫째 달로 헤아리므로 둘째 달은 음력 12월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 등지에서는 석가의 성도일을 음력 12월 8일로 보고 경축하게 되었다.


 2. 성도 때의 나이에 대하여

 석가의 성도 때의 나이에 대해서는 30세설과 35세설이 있다. 팔리어 계통의 설은 29세 출가, 고행 6년이므로 35세 성도가 된다. 30세 성도설은 29세 출가, 1년 수행, 30세 성도와, 19세 출가, 12년 수행, 30세 성도의 이설로 나누인다.

<파알리열반경>은 29세 출가설을 취하고, 출가해서 입멸 80세까지를 51년으로 계산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고행한 6년을 넣으면 35세 성도가 된다. 법현 역 <대반열반경>은 이와 비슷한 설인데 29세 출가, 36세 성도라고 하고 있다. <유행경>은 29세 성도설이지만 성불해서 50년이라고 했으므로 30세 성도설인 셈이다. <불반니원경>은 개화도인사구년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출가 때의 나이는 불명으로 치고 30세 성도라고 한 것이며, <반니원경>은 19세 출가, 수도 12년, 30세 성도설이다. <유부잡사>는 <파알리열반경>과 꼭 같으며 29세 출가, 그후 입멸까지의 출가기간이 50여년 즉 51년으로 되어 있다.
 같은 열반경이라도 그 소전의 부파가 다른 까닭에 이와같이 설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각본의 열반경에서 보면 가장 유력한 설은 <파알리열반경>, <유부잡사>, <대반열반경>의 삼본이 주장하는 29세 출가, 6년 고행, 35세 성도설이다. 출가의 나이에 관해서는 19세설과 29세설이 있지만 역시 비교 검토해보면 29세설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29세 출가설이 유력하고 6년 고행설이 유력하다고 한다면 자연히 35세 성도설이 유력해지게 된다.


 3. 깨달음의 기쁨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나 하는 것은 도저히 우리 범부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 범부는 다만 우러러 존숭하고 찬탄하며 경앙하는 수밖에 없다.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만상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을 비취는 것과 마찬가지로 맑은 마음에는 모든 경계가 다 와서 거기에 머문다. 그 마음을 바다에 비할 수가 있다. 마음이 경계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마음의 바다에 와서 머무는 것이다. 실로 깨달은 그 분의 이와 같은 것으로, 이를 일컫어 또 ‘해인삼매’라고도 하는 것이다. 제법 즉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을 여여실실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도한 붓다는 고요히 동쪽을 향하여 앉아 있을 뿐이지만, 이루 다할 수 없이 광대하고 모든 것에 두루 한결같은, 즉 어려운 말로 무진평등한 진리가 그 육신에 가득차 ‘적멸의 선락이 무변’한 것이다. 적멸한 채로 그냥 ‘일체의 귀’(모든 것이 돌아가는 곳)가 되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정법(正法, 올바른 진리)을 설하는 것이다. 성자에게는 말씀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그대로 대설법이며 대웅변인 것이다. 부처님 일대의 설법은 실로 이 적멸의 선락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으로 그저 때에 따라 그것을 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스스로 내면적으로 증오한[自內證] 경지는 우리가 능히 알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우러러 존숭해야 할 것이기는 하나 부처님의 설법의 말씀을 통하여 다소 그 묘경계를 들여다 볼 수 있을 뿐인 것이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다.
 부처님이 성도한 후의 이야기들을 기록한 여러 율장에 의하면 부처님은 마귀를 항복시키고 성도한 한 4·7일 즉 28일 동안 혹은 49일 동안 보리수 밑에서 또는 그 밖의 다른 나무들 밑을 찾아 홀로 부좌하고 열반의 맛을 맛보았다고 적혀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화엄경>의 소위 적멸의 선락인 것으로 언어의 길이 끊긴 묘한경계를 스스로 즐기는 그러한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4. 나무 밑에서의 정관

 이와 같은 자수용법락의 7일째 되던 날 초저녁에 부처님은 이 세상 만물의 실존적인 상황에 상도하였다.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 만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서로 얽히고 서로 관련되어진 상황에 놓여 있다. 그와 같은 인과관계를 재래로 한역경전에서는 연기라고 불러 온 것이다. 연기란 인도의 원어로 말하면 pratityasamutpada 라고 하는 것으로 ‘…에 대하여 라는 관계에서 더불어 생기는 것’ 그것이 연기의 본뜻이다. 그것은 중생들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어 가는 도중에 여러 가지로 갈피를 잃고 고통 속에 헤매는 인과관계를 의미할 수 있다. 인생의 인과관계를 이렇게 봐 내려가는 것을 순관이라고 한다. 그러나 반면에 인간들이, 그러한 혼미에서 어떻게 하여 벗어나 고통 없는 행복한 경지를 누릴 수 있는가 하는 인과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후자를 역관이라고 한다. 또 연기란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도 한 것으로 우주의 만상에 공통되는 움직임일 수 없는 이법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이 고통 속에 태어났다가 불행하게 죽어 가는 그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부처님이 풀 수 있었던 유일한 열쇠가 바로 이 연기의 이법이다. 어떻게 말하면, 부처님의 스승은 바로 이 법 자체였던 것이다.
 역관라고 하고, 순관을 멸관이라고도 한다. 후대의 경전들은 연기를 열두 가지 현상의 인과관계로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십이연기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① 노사(老死, 苦惱) 
 ② 생 
 ③ 유(有, 個體) 
 ④ 취(取, 執着) 
 ⑤ 애(愛, 愛着) 
 ⑥ 수(受, 感受作用) 
 ⑦ 촉(觸, 接觸) 
 ⑧ 육처(六處,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감각기관) 
 ⑨ 명색(名色, 名은 槪念, 名稱, 色은 형태, 성격) 
 ⑩ 식(識, 分別作用) 
 ⑪ 행(行, 潛在的 意志力) 
 ⑫ 무명(어리석음)


 일체의 법은 평등하다. 무성무상하며 무생무멸하고, 본래 청정하여 희론치 않으며 취하지 않고, 사하지 않고, 떠나 있어 몽환 등과 같고, 또 유무불이인 까닭에 제법은 평등하다. 
 일체의 법이 평등하다는 것은 모든 사상이 차별적이지만 그냥 그대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여여한 실상이라고 부른다. 차별이라고 하지만 그 차별은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인 까닭에 그 자체에 무슨 항구불변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차별적인 개체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말이 공이란 말이다. 그 공이 바로 실상인 것이다.
 초기의 불교도들 간에는 세계의 현실을 설명할 때에 어떤 고정관념을 사용하되 그 관념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다, 괴롭다, 허망하며, 알맹이가 없는 것이다, 운운할 때에 갖가지 차별의 모습으로 전개되는 그 실상을 영원하고 집착 없는 관점에서 내다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모든 것은 변화하고 전변한다. 그것은 인연생인 까닭이며, 따라서 제행은 무상하다. 이 무상은 사물이 처해 있는 그대로의 상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 말은 브라아마니즘의 고전인 <우파니샤드> 등에 실린 상주설을 반대하는 것이다. 또 뒤집어 말하면 무상한 그대로 상주한 것으로서 꽃은 피면서 상주하고 잎은 지면서 상주한 평등상, 실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망각한 무상설은 역시 집착된 관찰방식이며 지혜가 원만치 못한 자가 보는 방식이다.
 또 무아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인도 고유의 영혼 실유론과 같은 그릇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말한 것으로 그 실아(實我, 아트만)라고 생각되는 ‘마음’이 결코 허무도 객관적인 실체도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마음’은 한편으로 말하면 인연생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말하면 영원히 그냥 그렇기만 한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한 살아 있는 진리를 불성이니 여래장이니 하였다. 불성이란 부처님이 된 원인이며, 여래의 종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아를 허무로 해석하는 것은 지혜가 덜 발달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짓인 것이다.
 또 고라고 했지만 그것은 세속의 의미로 고인 것이지, 고락(苦樂)을 초월한 부처님의 경지에서 말하면 고일 수가 없다. 실로 용수보살도 말하였듯이 일체개고라 한 것은 ‘유루법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으로서 무루의 사람에게는 고가 아닌 것이며’ 그렇다고 또 낙도 아닌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법열이며, 법락인 것이다. 공이라고 한 것은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말한 것뿐이다.
 부처님이 본 세계는 성도 상도 없고, 생멸이니 유무니 하는 구별이 없이 평등한 세계다. 그와 같은 경지는 오직 만물을 차별하지 않는 대자비의 심경인 것이다. 그런 경지를 <십지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일체의 법의 그러한 상을 관하고 대비를 으뜸 삼아 그것만을 증장시키는 까닭에 이 세상의 생멸의 상을 관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육신을 얻어 태어남은 모두 ‘나’라는 것에 탐착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나’라는 것에 집착을 하지 않게 되면 곧 태어남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부처님인 까닭은 그 대비의 마음 때문이다. 자기를 무로 돌리고, 자기를 잊고 남을 앞세우는 것은 모든 중생이 있어야 하는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모습이다. 사람들이 이 사실은 잊어버리고 자기만을 주장할 때에 그릇된 사견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릇된 자아의식에 빠지는 것을 아견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견 때문에 여러 가지 미난이 생기는 것이다. 아견을 떠나면 나와 남과의 대립, 생과 멸과의 차별이 없는 평등일여한 경지가 열리는 것이다. 
 “모든 어리석은 사람들은 항상 그릇된 생각을 따르고, 망녕된 길에 들어서, 어리석음에 눈이 멀고 그릇된 ‘나’에 애착을 가져 세 가지 종류의 행동을 일으킨다. 즉 죄짓는 일, 복있는 일, 동함이 없는 일의 셋이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온전치 못한 마음의 씨를 발생케 하고, 또 그 온전치 모한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생사를 겪는 육신을 낳게 된다. 이를테면 업을 땅이라 한다면, 식은 종자로서 이것이 무명에 뒤덮이고, 애착의 물에 젖어 내 마음에 관개하고, 여러 가지의 견해를 증장시켜 명색의 싹을 낳게 한다. 명색 때문에 여러 가지 근(根, 감각기관)이 생기고, 여러 근이 합하는 까닭에 촉이 있고 촉으로부터 수가 생기며 괘락적인 수(受, 樂受) 때문에 애가 생기고 애가 증장하는 까닭에 취가 있고 취의 인연 때문에 개체(有, tkfa)가 있고 그 개체에 다섯 가지 구성요소(五陰身)를 일으키는 까닭에 生이라 하고 이 구성요소들이 변하는 것을 일컫어서 노라 하고 이 구성요소들이 없어지는 것을 일컬어서 사라고 하는 것이다. 노사의 인연으로 근심과 걱정, 슬픔, 고민 등의 모든 고통이 생긴다. 이것이 십이인연이다. 모으는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흩어지게 하는 주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연이 합하면 곧 있고, 연이 흩어지면 없는 것이다.” 
 이 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미혹이란 실로 일념으로서 홀연히 생겨 천개 백개의 파도와 같은 기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필경 그 까닭은 실상d의 묘체, 제일의제를 모르는 무명에 있는 것이다. 이 무명으로부터 ‘나’라는 마음이 생기고, 죄와 복이 구별되고, 번뇌가 생기며, 생사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이합집산의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연이 합하면 있고, 연이 흩어지면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은 오직 연의 집산뿐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은 “삼계는 허망한 것으로 다만 일심이 지은 것이다. 십이연분은 모두 이 마음에 근거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기의 깊은 뜻은 그 밖의 여러 대승경전 속에 잘 천명되어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 증오한 내용의 골자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 경계는 불가사의하여 
 업이 능히 온갖 경계의 상을 다 일으키도다. 
 중생의 때가 더러우니 나라가 청정치 못하며 
 행하는 업은 무량하여 세계가 한결같지 않도다. 
 부처님의 나라는 깨끗한 장엄에 가득차 있으니 
 더러움 없는 온갖 보패로 장식되어 있도다. 
 무구함을 기르고 가꾸어 서원의 바다를 넓히니 
 부처님 제자는 능히 무수한 국토를 청정케 하도다. 


 화엄세계의 바다 
 진리의 경계는 한결같이 차별이 없네 
 장엄하고 청정하기 비할 데 없으며 
 허공에 안주하여 계시네.
 이 세계의 바다 속의 
 온갖 경계는 사의키 어려우니 
 그 하나하나가 모두 자재하여 
 각각 잡난함이 없는 것일세.

 진여는 거짓을 떠나 항상 적정하며 
 생함도 멸함도 없이 두루 미치지 않는 바 없으니 
 부처님들의 경계가 또한 그러하도다. 
 체성이 평등하여 늘거나 줄지 않으니 
 비컨대 틀림없는 경계이나 경계 아님과 같고
 두루 삼세에 걸쳐 있으되 또한 그렇지 아니하니 
 도사이신 부처님의 경계가 또 그러하도다. 
 삼세에 두루 미쳐 모두 장애가 없으며 
 법성은 지음도 없고 변이함도 없으니 
 마치 허공이 본래 청정함과 같도다.
 부처님 본성의 청정함이 그와 같으니 
 본성은 성이라 할 바 아니며 유무의 별을 떠나 있고 
 법성은 언론에 있지 아니하며 
 언설을 떠나 항상 적멸하도다. 

 위의 게송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상을 진여니 본성이니 법성이니 하지만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실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실상은 일체만물의 여여한 상을 두고 한 말이다.
 보리수 밑에서 7일 동안을 보내고 난 뒤 부처님은 또 ‘아쟈파알라 니구롯다’라는 다른 나무 밑으로 가서 또 7일을 보내고 다음 세 번째 7일은 무챨린다 나무 밑에서 보냈고, 그리고 네 번째 7일을 ‘라자야타나’란 나무 밑에서 보냈다. 둘째 7일 동안에는 모든 것을 비웃는 버릇이 있는 거만한  승려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진정한 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 7일 동안에는 날씨가 나빠 찬 비바람이 계속하여 불었는데 그 동안에 용왕의 시중을 받았다. 넷째 7일 동안에는 먼 북쪽 지방으로부터 온 두 행상인 타팟수와 발리카의 공양을 받고, 두 사람의 원을 받아들여 최초의 재가제자 두 사람을 얻었다. 그때는 아직 출가한 제자들의 집단이 없을 때인데, 이와 같이 세속생활을 그대로 하면서 부처님을 받들어 그의 가르침을 실행해 가는 남자들을 우파아사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우루베에라의 숲 속에서 고행을 할 때에 이미 사람들로부터 대성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이 부처님이 고행을 버리고 지금 보리수 밑에서 성도한 뒤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그 거룩한 위덕에 감화를 입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5. 범천권청 

 <율장> 및 몇몇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성도 후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는 것을 주저했지만, 천상 세계에 사는 범천의 권고로 세상 사람을 위한 설법을 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에 관한 <율장>의 산문 부분은 분명히 후세의 것이지만 거기에 인용된 시구는 좀 오래된 문헌에 속하는 것이다. 부처가 설법을 주저한 모습을 이 시구에 의해서 엿보기로 하자.
 애써 고생하면서 내가 증득한 것들도
 이제 어떻게 말할 수가 있을까?
 탐욕과 시기, 질투, 분노에 병든 사람들이
 이 법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되며, 지극히 미묘하고,
 심원하여 보기 어렵고 미세하므로
 욕심에 집착하고, 암흑에 덮인 자들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범천은 다음과 같이 부처님께 설법을 권고했다.
 더러움을 탄 사람이 생각해낸 더러운 교법이 일찍이 마가다국에 나타났습니다.
 원하옵건대 이 감로의 문을 열고,
 무구하신 분께서 깨달으신 법을 들려주소서.
 비유하건대 산꼭대기의 바위에 서서
 두루 모든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이
 지혜가 탁월하신 사방에 눈을 가지신 분이여,
 당신은 법으로 된 고루에 올라
 스스로 이미 근심을 넘어서 계시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우수에 잠겨 생과 사의 위협에 떠는 모든 사람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일어서 주시옵소서. 영웅이여, 승리자여,
 캬라반의 주인이시어, 부채 없으신 분이시여, 이 세상 사이를 걸어 주시옵소서.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
 깨닫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범천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믿음을 버려라.
 범천아, 사람들에게 해로울까 싶어 미묘한 법을 사람들에게는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당시의 인도 사회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행위였다고도 할 수가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기 전까지 인도의 지배적 종교였던 브라만교도들 사이에서, 특히 <우파니샤드>의 철인들 사이에서 진행되던 교육방법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여실히 알 수가 있다. 이 철인들은 가르침을 받을 대상을 좁게 제한하고, 자기 아들이라든가 혹은 그 밖의 몇몇 훌륭한 재간 있는 사람들에게만 진리를 전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당시의 습관을 완전히 깨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까지에는 상당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소위 범천권청이라는 사실이 실제로 있었던 것은 그런 견지에서도 짐작이 된다.
 그러면 누구에게 먼저 그 깨달은 진리를 전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초기 경전은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먼저 누구에게 법을 설하는 것이 좋을까? 누가 이 법을 속히 이해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참말 알라라 칼라아마는 현자고, 식견이 있고 총명하고, 오랫동안 무구하게 산 사람이다. 자, 그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하자. 그는 법을 빨리 이해할 것이다.’ 그때 어떤 천인이 내 곁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현자여, 알라라 칼라아마가 죽은지 칠일이 됩니다.” 나에게도 그와 같은 지견(智見)이 생겼다. ……
 그때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참말로 라마의 아들 웃다카는 현자며 식견이 있고 총명하고, 오랫동안 무구하게 산 사람이다. 자 라마의 아들 웃다카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하자. 그는 이 법을 빨리 이해할 것이다.’ 그때 어떤 천인이 내 곁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현자여, 라마의 아들 웃다카는 어젯밤에 죽었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지견(智見)이 생겼다. ……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가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내 일을 돌보아 주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들은 나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자, 나는 제일 먼저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법을 설하자.’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섯 사람의 수행자가 지금 어디에 있을 것일까?’ 나는 맑고 깨끗한 초인적인 천안을 가지고 다섯명의 수행자들이 바라나시의 선인들이 사는 곳, 사슴의 동산에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우루벨라촌에 머무르고 싶은 대로 있다가 바라나시로 향해서 걸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부처님은 일찍이 교제가 있었던 사람들을 상기하고 먼저 그들에게 자기가 깨달은 내용을 전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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